본문 바로가기

My story/LIFE

불안감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



요즘 불안감 (Anxeity)과 공포 (terror)에 대해 관심이 많다. 

특히, '불안감과 공포가 나를 엄습해 올 때,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또는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모습인가?' 등의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져보곤 했다. 

지금 당장 내 머리속에 떠오르는 가장 교과서적이고 바람직한 대처는 역시 말씀 + 기도 + 찬양의 콤비네이션이다. 사실 나는 위기의 때 (?)에 나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 여러 성경 말씀들을 암송해 왔다. 불안할 때마다 암송한 말씀들을 기억해내어 읖조리면서 내 마음을 바로잡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도움이 되었다, 어느 정도 까지는.

그러나 최근에 내 이성이 마비될 정도로 극심한 불안과 공포를 겪을 일이 있었는데, 내가 외운 말씀들을 아무리 쓰고 암송해도 내 머리 속에 부정적인 생각이 없어지지 않았고 내 마음 속의 부정적인 감정들은 떠나가질 않았다. 이같은 상황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 암송을 시작한 것인데, 암송을 했음에도 내 속에 불안과 공포가 사라지지 않음에 나는 좌절했다.


1년 전부터 시작된 말씀 암송

물론 모태신앙으로 자라왔던터라 설교시간에 반복해서 들은 말씀들은 굳이 스스로 외우려고 하지 않았어도 저절로 머리속에 남아 있다. 그러나 의지적으로 그리고 스스로 암송을 시작하게 된 것은 1년전이 되겠다. 당시 존파이퍼 목사님의 When I don't desire God 이라는 책을 읽던 중, 성경 암송의 유익에 대한 내용이, 평소에 암송을 하고는 싶지만 귀찮아서 하지 않았던 나의 마음을 때리게 되면서 암송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의 말씀이 성경 암송의 정당성을 내게 입증해 주었다.


[디모데후서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영어 성경을 보면 좀 더 역동적인 느낌이 강하다. "All scripture is breathed out by God..." (ESV) 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즉, 쉽게 말해, 성경책 속의 모든 말씀들이 하나님의 입김으로 나왔다는 것이다. 나는 이 표현을 보는 순간,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신 장면이 떠올랐다.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Then the LORD God formed the man of dust from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fe, ..."

아담을 지으실 때도 하나님이 후~ 입김을 불어넣으신 것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입김에는 '생명'이 있으며, 하나님의 성경이 정말로 하나님의 입김을 통해 나왔다면, 성경책은 정말로 생명이 있는 말씀이다.


위의 사실을 깨닫고 난 후, 다음과 같은 명제를 세우고 믿었다.

"내가 평안하고 편안할 때 많은 말씀들을 미리 외워 놓으면, 위기의 때에 그 말씀들을 기억해 내어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지켜줄 것이다."



암송 시작후 1년이 지난 후

어플을 이용해 말씀들을 외워오고 있으며, 그때 그때 감동이되거나 위로의 말씀을 읽게 되면 추가하면서 암송 말씀들을 늘려 나가고 있다. 무려 20-30개 달한다 (영어 공부도 할 겸해서 영어로 외우고 있다). 


이렇게 암송을 해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주에 나는 극도의 불안과 공포를 경험했다. 외우던 말씀을 다시 암송하고 종이에도 쓰고 했지만 내 마음 속의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이때 정말로 엄청난 좌절감을 경험했다. 그리고 다음의 질문이 내 머리소게 불현듯 떠올랐다.


'나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고 말하고, 또 그것을 암송한다고 믿었었는데... 나는 성경을 단순히 머리로만 (지식적으로) 외웠던 것인가?' 내가 머리로만 이 말씀을 외운게 아니고, 진정으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믿었다면 지금처럼 두려워하면서 불안해 할 수 없지 않은가?'


이 생각이 나를 한층 더 좌절시켰다. 


나를 공포로 몰아넣은 원인 인자는 사실 6월 중의 어떤 event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어찌 어찌 이 사건을 잘 마무리 되었고,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한 상태로 돌아왔다. 그리곤 스스로에게 다시 물어보았다: 이같은 상황이 다시 벌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내린 결론은, '이같은 상황이 다시 벌어지지 않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면, "세상이 주는 걱정과 불안에 휘둘리지 않고 +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사는 것은,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라는 것이 나의 잠정적인 결론이다. 나는 결국 일주일 전과 같이 불안감이 나를 파괴하는 상황을 또 다시 만들고 말 것이다. 죽을 때까지 계속.

만약 내 힘만을 의지하려고 한다면 말이다.


쉬운 예를 들자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당신의 의지로 가능하겠는가?


성경에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많다. 당신의 의지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힐링 관련 심리학책들을 봇물터지듯이 출판되는 것만 보아도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라는 사람이 많다는 증거이다. 애초에 인간적인 의지로 두려움과 불안을 극복할 수 있다면, 그와 같은 책들이 인기가 없을 것이다.

인간적인 의지로는 성취 불가능한 사건들이 성경에 무궁무진하다.


나는 깨달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기 위해서는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리고 오직 성령님이 내게 힘을 주셔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과연 내가 살아오면서 성령님을 간.절.하.게. 구하는 기도를 몇번이나 했는지 생각해보니, 부끄럽게도 거의 없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라는 식으로 하나님을 부르는 기도야 많이 했지만, 구체적으로 "성령님"이라고 부르면서 그분을 구하는 기도를 한 기억이 없다. 그래서 나는 일주일 전부터 성령님의 임재와 그분의 역사하심을 구하는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성경 말씀을 토대로 하나님께 졸랐다. 


"하나님! 누가복음 11장 13절을 통해,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제게도 성령을 주세요!"


성령을 구하는 기도를 하며 하루 이틀 살아가던 중, 내가 부질없다고 느꼈던 암송... 그 암송 구절 중의 말씀 하나가 내 머리속에 떠올랐다.


[베드로전서 5:6-7]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그리고 개인적으로 성경 순서대로 큐티를 해오고 있는데, 열왕기하 2:9과 3:15 말씀을 주목케 하셨다.


[열왕기하 2:9]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 엘리사가 이르되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하는지라."

[열왕기하 3:15]
"이제 내게로 거문고 탈 자를 불러오소서 하니라 거문고 타는 자가 거문고를 탈 때에 여호와의 손이 엘리사 위에 있더니"


저 말씀들을 한 번 곱씹어 보았다. 그리고 나서 생각하길, 이번에 내가 겪은 극심한 두려움의 사건 (?)은 어쩌면 나를 겸손하게 만들고 무릎 꿇게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훈련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그렇게 믿는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 날 이후의 내 모습을 보고 알 수 있었다.


나는 내 인간적인 암송의 노력으로 내 삶을 두려움없이 살고자 했다. 그리고 실패했다. 내 머리속의 암송 말씀들이 내 마음까지 내려가지 못하는 것을 보고 좌절했다. 그리고 나는 내 삶에 성령님이 필요하심을 깨닫고 그분을 구하기 시작했다. 전체 그림이 보이는가? 


나의 부족함으로 인해 나는 상황을 악화시켰고, 악화된 상황은 나에게 엄청난 불안감과 두려움을 주었다. 비록 그 상황은 애초에 나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발생했지만, 그 상황마저도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해 주셨다. 그 힘들었던 경험이 베드로전서 말씀 처럼 나를 겸손하게 (무릎꿇고 기도하게) 만드시고,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 거하라고 하셨다. 나는 하나님의 손 아래에 거하는 것을 성령님과 동행함으로 해석한다. 이 같은 해석을 가능하게 해준 말씀은 위에 적은 열왕기하 2-3장 말씀들이다.


왕하 2:9에서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성령이 하시는 역사를 갑절이나 구했다. 존 맥아더 스터디 바이블에 의하면, 실제 수치상으로 2배의 역사를 더 행하게 해달라는 의미 보다는 (결과적으로는 엘리야보다 더 많은 이적을 행하긴 했지만), 선지자라는 중대한 직책을 엘리야의 후계자로서 수행하는 것이 너무 벅찬 일이고 또 자신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같이 구했다는 해석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구했더니, 여호와의 손이 엘리사 위에 있었다고 했다 (왕하 3:15). 쉽게 말해, 성령의 역사하심을 구했고, 열왕기하 2장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셨음을 읽을 수 있었으며, 3장에서 실제 하나님의 손이 엘리사 위에 임했다. 이 해석이 맞다면, 하나님의 손 아래 거하는 것이 성령님의 인도하심 아래 거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나는 열왕기하의 말씀 묵상을 토대로 기도했다. "하나님, 저 역시도 하나님이 제게 허락하신 현재 이 일들을 수행해 나가기에는 저의 능력이 너무 부족합니다. 제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학교에서의 일이든, 내 마음속의 감정이든, 하나님이 허락치 않으시면 제 인간적인 능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지나서 생각해보니, 내가 드린 저같은 기도는 사실 베드로전서5장 6절의 말씀을 실천하는 행위임을 깨달았다 (정확히는 저 말씀을 실천하도록 이끄시신 하나님을 목격했다가 맞겠다). 즉,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 거하는 것 (=성령님과 동행)을 사모하게 상황을 이끄셨고, 나를 겸손하게 (=좌절하고 무릎꿇게) 만드셨다. 그 다음 구절에 주목하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나는 그동안 암송은 했지만, 실제로는 내 인간적 의지로, 외운 암송을 공식 대입하듯 꺼내서 두려움을 이기려고 했던 것 같다. 나는 하나님의 능하신 손 (성령님) 아래에 거하는 겸손함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곧바로 내 염려만을 처리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령님을 구하고, 겸손하게 하는 법을 먼저 배우게 하셨다. 


성령님과 함께 동행하며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다면, 이젠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길 준비가 된 것이다. 사실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이 시작되면 염려는 급격히 줄어들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벧전 5:7 말미에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우리를 돌보심을 진정으로 믿고 산다면, 잠깐 힘든 일들이 있어도 합력하여 선을 이룰줄 알기에 염려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분의 능하신 손 안에서 겸손하자. 그리고 모든 염려를 그분께 맡기자. 그분이 우리를 돌보신다 :D


P.S. 벧전 5:6-7 말씀을 통해 주신 교훈을 생각해보면, 암송하는 것이 부질 없는 짓이 아니었음을 깨닫게도 해주셨다.

'My story > LIFE' 카테고리의 다른 글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많을 때...  (0) 2014.11.04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0) 2013.04.05
2009년 7월 1일 그날,  (0) 2012.12.22
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잊지마  (0) 2012.12.17
생각해보니  (0) 2012.10.29